사라지는 영토, 사라지지 말아야 할 국가는 무엇인가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이제 과학 보고서 속의 예측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직접 마주하고 있는 현실적인 위기입니다. 특히 해발 고도가 낮은 도서국가들은 매년 국토 침식과 침수 피해를 겪고 있으며 일부 국가는 장기적으로 거주 가능한 영토 자체가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까지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 국제법 질서 전반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국제법은 전통적으로 국가의 성립과 존속을 물리적 영토를 전제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만약 영토가 자연현상으로 인해 완전히 소멸한다면 해당 국가는 더 이상 국제법상 국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주권, 국민의 법적 지위, 해양 권리, 국제기구 회원 자격 등과 직결되며 기후위기 시대 국제법이 직면한 가장 복합적인 쟁점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전통 국제법이 전제해 온 국가 성립 요건의 한계
국제법상 국가 성립 요건은 일반적으로 1933년 몬테비데오 협약에서 제시된 네 가지 요소로 설명됩니다. 일정한 영토, 항구적인 국민, 정부, 그리고 다른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영토는 국가 개념의 물리적 기반으로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국제법은 영토의 크기나 완전성을 엄격히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매우 작은 섬이나 분쟁 상태에 있는 영토를 가진 국가도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영토의 일부 상실은 곧바로 국가성 상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문제는 영토가 일시적으로 축소되는 수준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소멸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극단적 상황은 기존 국제법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영역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전통적 국가 성립 요건을 그대로 적용할 경우 기후변화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국가 지위를 상실하는 불합리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국제법의 정의와 형평성 원칙 측면에서도 재검토가 필요한 지점입니다.
해수면 상승이 초래하는 전례 없는 법적 공백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국가 소멸은 국제법 역사상 거의 전례가 없는 문제입니다. 이는 자연재해가 일시적으로 국가 기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토 자체를 구조적으로 없애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투발루, 키리바시, 몰디브와 같은 국가들은 이러한 위험을 이미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들 국가는 단순한 이주 문제를 넘어 영토가 사라진 이후에도 국가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만약 국제법이 영토 상실을 이유로 국가 지위를 부정한다면 해당 국가의 국민은 집단적으로 무국적 상태에 놓일 수 있습니다. 이는 국제인권법상 보호 공백을 발생시키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법적 공백은 국제기구 회원 자격, 조약 당사국 지위, 외교적 보호권 등 다양한 영역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따라서 해수면 상승 문제는 단순히 환경법 차원이 아니라 국제법 전반의 구조적 재검토를 요구하는 사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토 없는 국가' 개념과 국가성의 재해석
최근 국제법 학계에서는 영토 없는 국가 또는 탈영토화 된 국가라는 개념이 점차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는 물리적 영토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정부와 국민, 국제적 승인과 외교 관계가 유지된다면 국가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국가 개념을 기능적 요소 중심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평가됩니다.
국제법은 고정된 규범 체계가 아니라 국제 관행과 합의를 통해 진화해 온 법질서입니다. 과거에도 식민지 해체, 국가 분열, 망명 정부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국가 개념은 유연하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기후변화로 인한 영토 소멸 역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영토 없는 국가 개념이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국가 간 합의가 필요합니다. 특히 기존 영토 중심 국제질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단기간 내 명확한 규범으로 정착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배타적 경제수역과 해양 권리의 존속 문제
국가 영토가 소멸할 경우 가장 첨예하게 대두되는 쟁점 중 하나는 배타적 경제수역과 대륙붕 권리의 존속 여부입니다. 유엔해양법협약은 해양 권리를 육지 영토를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영토가 사라지면 해양 권리도 함께 소멸된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도서국가들은 이러한 해석이 기후변화의 책임을 피해국에게 전가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기존에 합법적으로 설정된 해양 경계는 고정되어야 하며 자연적 변화로 인해 자동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국제형평성과 지속가능성 원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만약 국제사회가 이 입장을 일정 부분 수용한다면 국가 영토가 소멸하더라도 해양 자원에 대한 권리는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는 해당 국가의 경제적 존속 가능성과 직결되며 국제 분쟁 예방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국민의 국적과 인권 보호 문제
국가 소멸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결국 국민의 법적 지위입니다. 영토가 사라진다고 해서 국민의 권리와 존엄까지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 국가 지위가 부정된다면 해당 국민들은 국적 상실 또는 법적 보호의 공백 상태에 놓일 위험이 매우 큽니다.
국제인권법은 무국적 상태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해 왔습니다. 따라서 기후변화로 인한 국가 소멸 상황에서는 국민의 국적을 유지하거나 집단적 보호 지위를 인정하는 새로운 법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이는 난민법, 인권법, 환경법이 교차하는 영역입니다.
특히 강제 이주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차별, 경제적 불안정, 문화적 정체성 상실 문제도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국가 지위 유지 논의는 단순한 법적 형식 문제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국제법 접근을 요구하는 사안입니다.
국제사회의 대응과 새로운 규범 형성 가능성
현재 국제사회는 이 문제에 대해 통일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국제법위원회와 일부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국가 지위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방향의 논의가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는 국제법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접근으로 평가됩니다.
향후에는 유엔 총회 결의나 특별 국제협약을 통해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국가 소멸 상황에 적용되는 별도의 규범이 마련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러한 규범은 국가성 유지, 해양 권리 보호, 국민의 법적 지위 보장을 포괄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국제사회가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경우, 실제 국가 소멸 사태가 발생했을 때 심각한 법적 혼란과 분쟁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의 논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마무리하며
기후위기 시대, 국가 개념은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가
해수면 상승으로 소멸한 국가의 국제법상 지위 문제는 더 이상 이론적 가설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대비해야 할 과제입니다. 기존 국제법 체계는 이러한 상황을 전제로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해석과 규범 형성이 불가피합니다.
국제사회가 국가 개념을 지나치게 영토 중심으로 고수할 경우, 기후위기의 피해는 환경을 넘어 법적·인권적 재난으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영토 상실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와 국민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국제법의 기본 정신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국제법이 변화하는 현실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에 대한 시험대입니다. 기후위기 시대의 국제법은 땅이 아니라 사람과 공동체의 지속성을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며 그 출발점이 바로 이 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유엔해양법협약
몬테비데오 국가 권리·의무 협약
유엔 국제법위원회 기후변화 관련 보고서
유엔환경계획 기후변화 자료
국제법학회 기후와 국가성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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